누가 샀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항상 집에 있던 바세린(Vaseline)은 상처 치료, 피부 보습, 각질 제거, 큐티클 정리 등 다양한 효능을 가진 ‘만능템’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데, 오죽하면 바세린을 빵에 발라먹는 곳도 존재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계기로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된 걸까?

바세린의 역사는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창업주 로버트 체스브로는 뉴욕대학교 화학과를 전공 후 향유고래기름을 정제하는 화학자가 됐다. 당시만 해도 석유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래로부터 기름을 얻어 연료로 사용했는데, 이에 적합하게 정제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1859년 석유가 발견되며 필요 없어졌고, 로버트는 곧바로 석유 기름을 연구하기 위해 펜실베니아로 향했다. ‘석유로 뭐라도 만들면 돈이 되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었다.

석유 시추 현장에 가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버트는 끈적끈적한 석유 찌꺼기, 로드 왁스에 관심이 갔다. 특유의 끈적거림 때문에 시추 장비를 고장 내는 골칫덩이였는데, 인부들이 이 로드 왁스를 모아뒀다가 상처가 나거나 화상을 입었을 때 피부 위에 바르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실제로 회복이 됐고, 흥미를 느낀 로버트는 그것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약 5년간 연구에만 매달린 로버트는 로드 왁스에서 ‘페트롤라툼’이라는 밝은색의 젤 성분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오리지널 바세린 제품은 바로 이 페르톨라툼 100%로 구성되어 있다.
1865년 해당 추출법을 특허 등록한 로버트는 그로부터 5년 뒤 브루클린에 ‘체스브로 매뉴팩처링사’를 설립하고 제품을 생산해 ‘바세린’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출시했다. 이것이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물론 출시하자마자 잘된 건 아니다. 로버트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오늘 그의 노력에서 성공 포인트를 찾아보려 한다.
최초의 샘플링 이벤트
로버트의 판매 수단은 마차였다. 마차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바세린을 화상이나 상처 치료제로 홍보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바로 무료로 샘플을 나눠주는 것!
일단 써보기만 하면 그 효과를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 로버트는 미국 최초로 샘플링을 시작했다. 의사, 약사, 주부들에게 샘플을 무료로 뿌리고 다녔는데, 그가 1873년까지 뿌린 샘플의 양만 50만 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지금 많은 브랜드사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한다. 항상 우리 제품이 가장 좋다고 얘기하지만, 그 제품을 써볼 기회에 대한 부분은 쉽게 하지 못한다. 당시 바세린은 화상 및 상처 치료제였기 때문에 의사와 약사들에 대한 설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샘플을 나눠주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설득을 이끌 수 있었다.
전문가로부터 효과가 검증된 제품의 인기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샘플이 동이 날 즈음에는 사람들이 바세린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샘플링 이벤트는 과거에도 진행돼 효과가 검증된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이다.

증명하려면 증거를 만들 것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눈으로 보여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로버트는 바세린의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피부에 고의로 화상이나 상처를 낸 후 바세린을 바르는 자해 마케팅을 진행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만, 이 방법은 많은 설득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결국 피부가 좋아진다는 본질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지금 하면 식약처 법률에 위배되거나 과장 광고로 신고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Before&After 방식인 셈이다.
1875년 영국 대행사를 통해 영국 시장에 진출한 바세린은 첫 해외 판매를 시작하며 1년 후 최초의 의학 저널 중 하나인 영국 런던의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 실리게 됐다. 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바세린을 매일 발랐는데, 얼마나 애용했으면 로버트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 2008년에 발간한 유니레버의 브랜드 보고서에 의하면, 이후 바세린이 전 세계적으로 39초마다 1개씩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공신력을 가진 매체와 사람의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기
바세린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바세린은 최전선에서 군인들의 상처와 타박상을 치료하고 자외선으로부터 탄 피부를 보호해 주는 구호품으로 활용됐다. 영국군이 담배와 교환했을 정도로 바세린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었으며, 많은 미군은 집에 ‘더 많은 바세린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부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20년대가 되면서 체스브로매뉴팩처링사는 의약품 시장에서 바세린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브랜드 인지도를 기반으로 화장품 산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동안에는 미군의 의료용품 공급처가 돼 바세린 브랜드 이름으로 미군에 페트롤리움 젤리가 포함된 화상 치료제, 소독용 거즈 등을 공급했다.
말하자면 시대적 흐름을 잘 활용한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엄청난 유통과 인프라를 확보하는 기회가 됐고, 전쟁터에서 미국 군인을 지켜주는 애국적인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었다.

마치며
이번에 바세린의 역사를 공부하며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바세린은 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화상과 피부 상처 치료에 직접적인 효과가 없다. 다만 그때만 해도 상처 부위를 통한 감염이 많았는데 바세린의 젤 층이 감염을 막는 역할을 했으며, 보습 성분이 습윤 환경을 조성해 치유 과정에 도움을 준 것이다.
제품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매우 주관적이다. 오랜 기간 바세린은 화상·상처 연고로 사용됐고, 사람들은 그걸 믿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하며 사실이 아닌 게 밝혀졌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장품이 좋다, 나쁘다의 영역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제품에 대해 평가하기보다는 임상과 인증을 통한 새로운 지표와 근거 있는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원문: 박진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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