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츄 좋아하세요? 저 피카츄 닮았단 소리 많이 듣거든요. 방전된 버전으로요.”
밤에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으면 대체 왜 그때 그 말을 했는지가 갑자기 떠오른다. 과거, 소개팅에서 분위기 띄워보겠다고 꺼낸 실없는 개그를 말한 그 순간, 상대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0.3초간 정적이 흐른 뒤 물 한 모금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날 이후 연락은 끊겼고, 그 장면은 지금도 불쑥 떠오른다.
또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너무 오버하다가 “넌 진짜 안 웃겨, 알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불을 힘차게 걷어찬다. 바로 ‘이불킥’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마 누구나 흑역사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문득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갔는데 그 흑역사가 재생되는 바람에 이불을 걷어찬 경험 또한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는가? ‘이불킥’에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심리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불킥을 대체 왜 하는 걸까?
이불킥은 대부분 밤에 찾아온다. 왜 그런 걸까? 낮 동안 사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바쁘다. 스마트폰 알림·업무 일정·사람들과의 대화·길거리 소음·광고 배너·밀려오는 카카오톡 메시지들까지. 집에 와서는 유튜브·OTT·SNS·쇼츠·릴스 등 온갖 자극적인 매체들이 뇌를 헤집어놓는다.
자극들이 머릿속에서 범람하는 사이, 응당 있어야 했을 자극에 대한 반응들, 이를테면 생각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따라 나왔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뇌는 다가오는 자극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정작 자극에 대한 나의 감상, 반응들이라든지 딸려 나온 감정적인 찌꺼기들은 ‘일단 나중에 보자’라는 식으로 뒤로 밀리게 된다.
그런데 밤이 되면? 모든 게 조용해진다. 불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귀에 들리는 건 냉장고 모터나 창밖의 바람 소리뿐이다. 외부의 잡다한 자극이 사라지자, 뇌는 드디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때 작동하는 게 바로 ‘야간 리플레이 모드’다. 낮 동안 감정적으로 찝찝했던 순간들, 진짜 쥐구멍을 찾고 싶었던 순간들, 예를 들어 소개팅에서 분위기 잡겠다고 갑자기 “혹시 이름이 Wi-Fi세요? 자꾸 연결되고 싶어지네요”라는 말을 꺼냈다가 정적이 흘렀던 순간 같은 흑역사들이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아무 외부의 자극이 없는 이 순간 비로소 뇌가 지난 생각과 감정들을 꺼내 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실 ‘이불’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불은 심리적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 이불 속에 숨은 상태라면 그 누구의 시선도 없고 평가도 없고 조롱도 없다. 바로 그런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이기에 나에게 가장 민감하고 예민했던, 차마 들춰볼 수 없었던 그런 흑역사들을 조심스레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수치심’이라는 사회적 감정은 오직 혼자일 때 가장 진하게 활성화되는 법이다.
이불 속에서 뭐 하세요? 후회와 사후가정사고
아오, 그냥 그때 입 닥치고 있었으면 됐는데.
이불킥에는 거의 항상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가 따라붙는다. 사후가정사고란, 심리학 용어로 우리가 과거의 특정 순간을 되짚으며,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하는 인지적 과정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후회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 한번 상상해보자. ‘그때 그냥 웃고 넘겼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식으로 만약 어떤 행동을 했다면·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더 안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라는 식으로 ‘대안 현실’을 상상해 보곤 하는데 이게 바로 사후가정사고다.
사후가정사고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상향적(upward) 사고는 ‘더 나았을 결과’를 상상하면서 아쉬움과 후회를 만든다. 반면 하향적(downward) 사고는 ‘더 나빴을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현재를 위로한다. 이불킥 상황에서는 상향적 사고가 압도적으로 많다. 뇌는 집요하게 나의 실수를 확대 재생산하며, ‘그때 그렇게만 안 했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달라졌을까’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로 현재의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사후가정사고를 단순한 자기 괴롭힘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후회라는 감정은 미래를 준비하는 시뮬레이션 훈련장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직장인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하는 상사 앞에서 “그 보고서, 제가 진짜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하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상사는 조용히 서류를 덮었다. 그날 밤 그는 이불을 걷어차며 외친다. ‘아오 진짜, 울긴 왜 울어…’ 동시에 그는 계속 생각했다.
그때 그냥 조용히 메모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고개만 끄덕이고 나중에 따로 피드백을 요청했더라면?
며칠 뒤 또 다른 보고서 제출일이 다가왔다. 이번엔 다르게 행동해 보기로 했다. 보고서를 더 철저히 검토하고, 예상 질문을 정리해 답변을 준비했다. 회의 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드백을 듣고,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질문했다. 회의가 끝나고 상사는 말했다.
이번 건 훨씬 정리 잘됐네. 좋았어.
이것이 사후가정사고의 핵심 기능이다. 심리학자들은 사후가정사고가 감정적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반복적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실수를 줄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행동 의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즉, 후회는 일종의 인지적 GPS 재계산 신호다. ‘다음에는 이리 가지 말 것’이라는 방향 수정이다.
한편, 사후가정사고는 통제감을 높인다. ‘내가 그때 더 준비했더라면’,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꺼냈더라면’ 등의 생각은 개인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즉 지각된 통제감(perceived control)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시험, 발표, 인터뷰 등에서의 실수 후에 사후가정사고를 한 학생들은 다음 과제에서 실제로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는 연구도 있다.
이불킥의 존재 이유: ‘나아졌다는 증거’
이불킥은 단순한 창피함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뇌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경고, 때론 피드백이다. 우리가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나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것이 핵심이다.
당시엔 미처 몰랐지만 이불킥을 할 만큼 ‘눈치가 생기고’, ‘성장한’ 지금은 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촌스러웠는지, 그 행동은 왜 그렇게 어색했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불킥이 찾아온다는 건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판단 기준·표현 방식·사회적 감각이 예전보다 예민해졌다는 뜻이 아닐까?
과거 신입사원 시절에 했던 어이없는 실수들이 생각나서 이불킥을 한다면? 나는 그 이불킥을 가리켜 성장의 증거라 칭하고 싶다.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부끄러운 것처럼,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보며 또 다른 이불킥을 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멈춰 있지 않다’는 강력한 증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뜬금없는 흑역사 소환에 이불킥을 시전하더라도, 끝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그게 쪽팔린 줄은 이제 아는구나. 그래도 좀 컸네.
생각해 보자. 만약 여러분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고, 누가 날 어떻게 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상태라면 흑역사도 이불킥도 없었을 것이다. 창피함이란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불킥을 한다는 건, 한때 그만큼 절실히 잘해보고 싶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고, 순수했고,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서 무리수를 던졌다. 뒤늦게 보면 어이없고 민망할 수는 있어도, 결코 비웃을 일은 아닐 것이다.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나의 흔적이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성장의 한 조각이니 말이다.

마무리: 흑역사? 아니 언젠가 ‘백역사’가 되리라
결국, 이불킥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민망함은 생존한 자의 특권이고 후회는 여전히 나아지고자 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니 이불킥이 찾아올 때는 당황하지 말고 이렇게 대응하자.
먼저 웃자. ‘아 진짜 그때 왜 그랬지ㅋㅋ’라고 한바탕 실소라도 터뜨려라. 그건 감정의 압력밥솥을 살짝 열어주는 행위다. 그리고 다음엔 이렇게 되물어보자. ‘그때 내가 바랐던 건 뭐였지?’ 칭찬받고 싶었는지, 분위기 띄우고 싶었는지, 혹은 그냥 외롭지 않았으면 했는지. 욕망을 인식하면, 그 장면이 조금은 이해될 것이다.
흑역사는 언젠가 결국 지나가고, 우리는 그 바탕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기꺼이 흑역사를 만들며(?) 살아가자. 인생에 그런 무리수는 꼭 필요하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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