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interactive.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16 Jan 2023 01:47:57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interactive.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interactive.ppss.kr 32 32 카카오의 바둑 인공지능이 축도 모른다고요?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55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55#respond Wed, 21 Nov 2018 02:09:23 +0000 http://3.36.87.144/?p=179655 카카오브레인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오지고(Og-Go)가 “18급도 아는 축을 몰라서” 신진서 9단에게 패했다고 조롱받고 있다. 일본의 ‘딥젠고’나 중국의 ‘절예’는 프로기사를 능가했는데, 오지고의 “어이없는 오류”를 보니 카카오브레인이나 우리나라의 인공지능 기술 수준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출처: 조선비즈

2016년 3월 13일, 나는 서울시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 마련된 TV 실황 중계석에 앉아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바로 윗 층에서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전날까지 3연패를 당한 상황이었다.

1국에서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의 수준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극 초반에 괴초식을 펼쳤는데 알파고가 정확한 파훼법으로 응수하자 일찌감치 비세에 몰렸다. 그런데 이후 알파고가 뻔한 자리에서도 승부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 조금씩 손해를 본 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2국에서 이세돌 9단은 무난하게 두면서 알파고의 실수만 받아먹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세돌 9단은 딱히 눈에 띄는 실수를 하지 않은 반면, 알파고는 종종 이상해 보이는 수를 뒀다. 방송 해설을 하던 프로 기사들은 종반까지도 이세돌 9단이 유리하다고 봤다. 그런데 막상 집을 세어보니 어느덧 알파고가 큰 차이로 이겨 있었다. 1국을 패했을 때보다 충격이 훨씬 컸다. 현대 바둑 이론으로도 계산이 어려운 나머지 직관에 의존하던 영역이 사실은 정밀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3국에서는 집 계산 대결로 가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세돌 9단이 초반부터 서둘렀다. 무리한 싸움을 걸어갔으나 정확히 반격당하고 나니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됐다.

드디어 4국, ‘집 바둑’으로는 안 되고 대마 싸움도 안 되니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먼저 실리를 잔뜩 챙겨 둔 다음에 상대의 진영에 깊숙이 침투해서 타개하는 것으로 승부하는 이른바 ‘조치훈 류’. 이세돌 9단은 단 세 판 만에 알파고의 약점을 간파해내고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알파고의 학습 데이터에 들어있지 않을, 즉 실전에 결코 등장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낯선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78수가 떨어졌다. 이 수가 놓인 다음이라도 알파고가 제대로 응수했다면 여전히 어려운 바둑이었지만, 알파고는 ‘떡수’를 연발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냈다는 점에서 과연 ‘신의 한 수’라 불릴만했다.

마지막 5국에서 이세돌 9단은 한 번 찾아낸 파훼법을 굳이 다시 사용하지 않고 그저 최선의 바둑을 뒀을 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중반까지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지만 인간이기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지면서 역전당했다. 그럼에도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돌리는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줬다.

2016년 3월 13일, 이세돌 9단 vs. 알파고, 제4국

알파고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둑 인공지능 중 최고로 꼽히던 것은 일본의 ‘젠’이었다. 젠은 인공지능 간의 바둑 대회인 UEC배에서 우승한 직후인 2016년 3월 23일, 왕년의 일본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에게 석 점 접바둑으로 도전해 승리했다. 2012년 3월 다케미야 마사키 9단에게 넉점 접바둑으로 승리한 지 만 4년 만에 치수를 한 점 줄인 쾌거였지만, 알파고에 묻혀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젠 vs. 고바야시 고이치 9단, 석 점 접바둑에서 젠이 승리했다. (2016년 3월)

젠의 개발자 가토 히데키 씨는 더 이상 바둑 인공지능을 개인적으로 개발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소프트웨어 기업인 드왕고의 후원으로 신경망 개발을 담당할 동경대 연구팀을 합류시켜 ‘딥젠고 프로젝트’를 출범시킨다.

일본 ‘딥젠고 프로젝트’ 출범 (2016년 3월)

신경망이 장착되자 딥젠고의 기력은 일취월장한다. 2016년 7월 여류 프로기사 최강자 중 한 명인 조혜연 9단한테 두 점 접바둑으로 이기고, 11월에는 여전히 일본 정상권에서 활약하는 조치훈 9단한테 호선(동등한 조건)으로 세 판 중 한 판을 이긴다.

2017년 3월에는 한/중/일의 일인자들을 초청해 ‘월드 고 챔피언십(World Go Championship)’ 대회를 열었는데, 중국의 미위팅 9단과 한국의 박정환 9단은 종반까지 비세에 몰렸다가 끝내기 단계에서 딥젠고의 버그 덕분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으나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은 끝내 딥젠고에게 패할 정도였다. 프로젝트가 출범한 지 1년 만에 아마 강자 수준에서 세계 최정상급 프로기사를 능가하는 실력이 된 것이다!

딥젠고, 조혜연 9단에게 두 점 접바둑으로 승리 (2016년 7월)
조치훈 9단에게 호선으로 세 판 중 한 판 승리 (2016년 11월)
박정환 9단(흑) vs 딥젠고(백), 박 9단 고전하다가 딥젠고의 끝내기 버그로 신승 (2017년 3월)

한편 중국은 알파고의 출현을 국가적인 자존심에 금이 간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바둑 종주국인데 영국 회사가 설치고 다니다니.

중국 정부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에게 10억 원 정도씩 시드 머니를 주고 바둑 인공지능 연구를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그중 두각을 나타냈던 텐센트에 수백억 원의 연구비를 몰아줬고, 텐센트는 내부 경쟁(특징이 서로 다른 바둑 인공지능을 동시에 여러 개 개발)까지 시켜가며 바둑 인공지능 연구에 올인했다.

이렇게 개발된 ‘절예’는 앞에서 언급한 월드 고 챔피언십 전초전 격으로 벌어진 UEC배에서 ‘딥젠고’를 압도적으로 이겨버려서 일본의 계획(UEC배에서 우승한 뒤 인공지능 대표 자격으로 한/중/일 일인자들을 상대하면 그림이 좋지 아니한가?)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젠 못지않은 ‘돌바람’이라는 바둑 인공지능이 있었다. 임재범 대표가 사재를 털어가며 어렵게 연구했음에도 젠을 종종 이길 정도였다. 딥젠고 프로젝트처럼 우리도 임 대표를 조금만 지원해주면 잘 될 것 같았다.

제1회 미림합배 세계컴퓨터바둑토너먼트에서 임재범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개발한 돌바람이 결승에서 일본의 젠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선 정부 지원을 요청하려고 미래창조과학부 소프트웨어 국장을 찾아갔다. 일개 교수가 요청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테니 이세돌 9단을 모시고 갔다. 당시 기사회장이었던 양건 9단이 이 미팅을 주선했다. 이세돌 9단의 기사회 탈퇴 파문으로 두 사람 사이가 껄끄러웠을 텐데, 양건 9단의 부탁에 이세돌 9단이 흔쾌히 응했다! 이런 만남이 보도돼 파문이 잘 수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중앙일보의 바둑 전문 기자인 정아람 기자도 초대했다.

과천 정부청사에서 나온 뒤 점심 식사를 하며 (2016년 5월)

돌바람을 도울 방법을 모색해봤으나 쉽진 않았다. 중국 정부가 특정 기업에 수백억씩 현금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특혜가 된다. 또 신규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비 타당성 조사부터 거쳐 예산을 잡아놔야 했는데 이때는 이미 굵직굵직한 건은 예산 집행이 끝난 단계였다.

그래도 머리를 짜낸 결과가 중소기업 지원 바우처 사업의 잔여 예산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기업에 현금을 직접 지원하는 대신 연구 용역을 담당할 대학에 연구비를 주고 그 결과를 기업에 기술 이전하는 형태였다. 이미 알파고가 나와서 임팩트 있는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는 아닌 반면 많은 관심이 쏠릴 과제라 난색을 표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다행히 ‘연구 중심 대학’의 교수 한 명을 설득했다. 뒷말이 안 나오게끔 나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런데 과제 제안서 준비를 시작할 때 임 대표가 망설였다. 바우처 사업의 예산 2억 원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가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지원을 받으면 또 받기가 까다로운데, 차라리 올해 예타부터 준비해서 내년에 2억이 아니라 20억쯤 받아 제대로 연구하는 게 낫지 않냐고 했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2017년을 기약하고 물러났지만, 이내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미래창조과학부도 올 스톱되고 만다. 정부 지원의 길이 막히자 그다음으로는 대기업들을 찾아다녔다. 영양가 없는 양해각서 체결하고 사진만 많이 찍었을 뿐 “바둑 인공지능 해서 돈이 되나요?” 하는 생각에서 늘 막혔다.

한동안 실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2017년 들어서 딥러닝의 고수들을 수소문해 다녔다. 한국기원에서 양질의 데이터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으니, 그걸로 바둑 인공지능 연구를 하는데 관심 있는 연구자들을 규합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카카오브레인의 인공지능 연구 부문 총괄인 김남주 씨를 만나게 됐다. 한현이 황충을 얻은 기분이었다!

카카오브레인 인공지능 연구 부문 총괄 김남주 씨

구글 딥마인드나 텐센트와 경쟁하려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연구자들을 규합해야 했다. 즉 오픈 리서치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누구나 본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개발 과정에서 제안된 아이디어는 제안자가 발표할 권리를 갖도록 한다.

카카오브레인은 이러한 협업을 가능케 할 플랫폼을 구현하고 컴퓨팅 파워를 제공한다. 한국기원은 골드 스탠다드 데이터 세트(gold standard dataset)을 제공함으로써, 그동안의 들러리 신세에서 일약 바둑 인공지능 연구의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카카오브레인과 한국기원의 바둑 오픈 리서치가 시작됐다. 여기에 세금은 한 푼도 안 들어갔다.

한편, 돌바람은 고군분투해 올해 초 딥젠고와 맞먹는 경지에 올랐다. 임 대표와 카카오브레인의 협력을 추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양측의 생각이 많이 달랐다.

돌바람을 만든 임재범 대표. 출처: 중앙일보

카카오브레인에서 개발하는 바둑 인공지능의 이름은 처음엔 ‘빵빵이’였다. 이름을 못 정해서 OO라고 놔둔 것을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빵빵이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지 세 달 만인 2017년 9월에 프로기사와 정선 정도의 치수에 들어왔다. 한 달 정도 후에는 프로기사와 호선에 승부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017년 10월, 알파고 제로가 등장했다. 강화 학습만으로도 지도 학습한 것을 뛰어넘었다. 기보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가이드 없이 기존 버전을 뛰어넘었다. 이론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던 것을 실제로 성공시켰다는 것이 놀라웠다.

빵빵이의 기력을 올리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또 바둑 인공지능 엔진들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우리 프로젝트 자체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했다.

2018년 들어서도 카카오브레인의 바둑 인공지능 연구는 계속됐다. 인공지능이 프로기사를 이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가 됐으므로, 기력을 올리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인공지능 연구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들을 해보기로 했다(자세한 것은 추후에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지고’라는 이름은 카카오브레인의 모 연구원이 발음하기 쉽고,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는 것과 같은 낱말(palindrome)’인 데다가, ‘급식체’로 쉽게 각인된다고 지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오지다’는 ‘오달지다’의 동의어로서 1)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2)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알차다는 뜻의 표준어라고 한다. 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으나 어쨌든 많이 회자되는 걸 보니 흥행에는 성공한 것 같다?

아무튼 오지고의 기력은 이미 프로기사를 뛰어넘은 수준이다. 올 3월 원성진 9단과의 대결에서 1승 1패를 거둬 화제가 된 고등과학원의 ‘바둑이’와 8월에 대결해 오지고가 승리한 바 있다. 프로기사와의 대결 중 일반에 공개된 것으로는 지난 10월 5일, 한국 슈퍼컴퓨팅 콘퍼런스 이벤트로 펼쳐진 신민준 9단(국내 랭킹 6위)과의 대국에서 오지고가 승리했다. 다음은 11월 5일 펼쳐졌던 신진서 9단(흑)과 오지고(백)의 기보다.

2018년 11월 5일, 신진서 9단(흑) vs 오지고(백), 83수 끝 흑 불계승

신진서 9단은 국후에 흑 39를 패착이 될뻔한 수로 꼽았다. 이 수는 D9 정도에 둬야 했다고 후회했는데 오지고는 D8을 추천했다. 백이 44, 46으로 귀를 넘어가서는 흑이 일찌감치 집 부족인 바둑이 됐다는 감상을 남겼다. 백 62로 끊는 수가 된다고 보고 52로 젖힌 것인데, 사실 이 축은 한 번 더 밀고 나가야 해서 인공지능이 보기 어려운 축이다. 또, 백 D11과 흑 C11을 미리 교환해뒀더라면 백 62로 끊는 수까지 돼서 흑이 곤란했다고 한다.

오지고의 ‘축 버그’는 알파고 제로 이후의 바둑 인공지능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알파고 제로 이후에 개발되는 바둑 인공지능들은 신경망의 입력으로 핸드크래프티드 피처(handcrafted feature)를 쓰지 않는다. 알파고 판 후위 버전의 경우에는 축을 포함해 약 50개의 피처를 따로 입력받았으나, 알파고 제로는 바둑판 자체(현재 바둑판의 상태와 7수 전까지의 상태)만을 입력받았다. 사람 같으면 바둑에 입문하자마자 배우는 축을 정작 알파고 제로는 학습이 상당히 진행된 다음에야 발견했다.

프로기사를 능가하는 기력에 저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다는 것을 일반인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번 사건으로 카카오브레인과 한국기원의 바둑 인공지능 개발 노력 자체가 조롱받는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어쩌랴. 절치부심해서 실력을 더 쌓는 수밖에!

원문: 감동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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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선풍기 전자파 검출 논란: 손 선풍기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안전할까?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7852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7852#respond Wed, 31 Oct 2018 07:07:04 +0000 http://3.36.87.144/?p=177852

휴대용 선풍기, 일명 ‘손풍기’에서 무시무시한 전자파가 나온다는 한 시민단체의 ‘조사 결과’가 큰 이슈가 됐다.

지난 20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시중에 판매되는 휴대용 선풍기 13개 제품을 측정한 결과 12개 제품에서 평균 647mG(밀리가우스)에 달하는 전자파가 검출됐다”라고 밝혔다. 특히 전자파 측정기와 휴대용 선풍기를 1cm가량 밀착시켜 측정해본 결과 13개 제품 중 12개 제품에서 평균 281mG의 전자파가 검출됐고 그중 4개 제품에선 정부의 전자파 인체보호기준인 833mG을 초과한 1020mG의 수치가 검출됐다. 이 같은 전자파 인체보호기준은 고압 송전선로 밑에서 발생되는 전자파가 15mG보다 56배나 높은 것이다.

우선 기사에 나온 833mG라는 기준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나라의 전자파 인체보호기준은 아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주파수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이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에 대한 전자파강도기준(미래창조과학부고시 제2015-18호)

60Hz, 즉 0.06kHz에 대한 자속밀도의 기준을 구하는 식(노란색 하이라이트)에 f=0.06을 대입하면, 5/0.06=83.3uT=833mG 가 나온다. 즉, 이 단체는 손풍기에서 나오는 자기장의 주파수가 60Hz라고 단정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60Hz는 220V 교류 전원의 주파수다. 그런데 손풍기는 건전지나 USB 직류 전원으로 구동된다. 모터는 자석으로 만들고 이 자석에서 자기장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자기장의 주파수는 모터의 회전수로 결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모터의 분당 회전수가 1,800rpm이라면 여기서 나오는 자기장은 30Hz의 기본 주파수(fundamental frequency)를 갖는다.

30Hz에서의 자기장(자속밀도) 강도 기준은 60Hz일 때의 2배인 1667mG이므로, 기사에서 지적된 케이스도 기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제품마다 모터 회전수가 다를 것이므로, 60Hz에 대한 기준값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의 반론을 보도하는 것도 아쉬웠다.

과기정통부는 그러나 휴대용 선풍기가 배터리를 사용하는 직류 전원 제품이라며, 교류 전원 주파수가 발생하는 전기제품에 적용하는 전자파 인체보호기준을 적용해 비교하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핵심이 되는 뒷부분을 잘라버렸다. 명색이 과학 전문 매체인데… 다음에 이어지는 멘트는 이랬다.

선풍기 모터 속도에 따라 발생되는 주파수를 확인하고 주파수별로 전자파 세기를 측정하여 해당 주파수 인체보호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구의 자기장도 500mG쯤 되는데 그 정도가 대수냐’는 식의 댓글이 공감을 많이 받았는데, 지자기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정자기장이므로 손풍기의 자기장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다.

그래서 과기정통부는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시중 유통되는 휴대용 선풍기의 전자파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 ‘손 선풍기, 전자파 인체보호기준 모두 만족’한다고 발표한다.

과기정통부는 전자파 측정표준을 담당하는 국립전파연구원이 전자파 강도 측정기준에 따라 측정했다고 설명했다. 시판 중인 580여 종의 모터 종류, 소비전력, 배터리 용량을 기준으로 제품군을 도출한 뒤 제품군별 모델 수를 고려해 45개 제품을 선정해 전자파를 측정했다. 휴대용 선풍기에서는 모터 회전 속도에 따라 37㎐∼263㎑에서 다양한 주파수가 발생했으며, 제품별로 특정 회전 속도(1∼3단)에서 2∼3개의 주파수가 발생했다. 발생한 주파수 대역별로 거리별 전자파 세기를 측정하고 해당 주파수 인체보호기준을 적용해 평가했다. 평가 결과 전자파가 최대로 측정되는 밀착 상태에서는 인체보호기준 대비 평균 16% 수준이었으며, 5㎝만 이격하면 기준 대비 평균 3.1%로 낮아졌다. 10㎝ 떨어질 경우 기준 대비 평균 1.5% 수준으로 나타났다.

애초에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측정한 결과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처음에 측정할 때 주파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전/자기장(EMF) 미터는 50~60Hz 대역에 사용하기 적합하도록 교정(calibration)이 돼 있고, 나머지 대역에서는 ‘frequency weighted’된 값을 보여준다. 즉 60Hz에서 2mG의 자기장이 2로 측정된다면, 120Hz의 2mG 자기장은 4로 측정되는 식이다.

또 모터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은 완벽한 사인(sine) 함수 형태를 가지지 않고 기본 주파수의 고조파들을 포함해 여러 가지 주파수 성분이 섞였다. 그러나 간단한 EMF 미터는 아래 사진과 같이 단일 값만 보여줄 뿐이다.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손 선풍기와 전자파 조사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성진 사무국장이 손 선풍기의 전자파 측정을 시연하고 있다. 출처: 머니투데이

이 값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전자파 방출 기준을 만족하는지 여부는 이런 식으로 측정할 수 없고 전체 스펙트럼을 측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닌데 특히 전자파가 그렇다. 한편 국립전파연구원의 실태 조사 결과 발표 이후에도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전자파가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어렵게 느껴지다 보니 온갖 괴담이 난무한다. 전자파 차단 스티커같이 불안감을 조장해 잇속을 챙기는 사기꾼들도 득실거린다. 이럴수록 언론에서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보도를 해주길 기대한다.

원문: 감동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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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의 마케팅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디자인하는가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68965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68965#respond Mon, 09 Jul 2018 00:57:10 +0000 http://3.36.87.144/?p=168965 스타벅스의 모바일 결제 서비스 가입자 수가 애플 페이의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좀 멀더라도 빽다방을 찾아다니던 나조차 미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스타벅스 단골이 되었다. 물론 한국보다 미국의 스타벅스 커피값이 상대적으로 제법 싸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기록을 되짚어 정리하고 보니, 스타벅스의 마케팅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교묘했다.

  1. 가끔 줄이 길 때가 있어서 모바일로 미리 주문해 두려고 스타벅스 선불카드를 하나 샀다.
  2. 며칠 있으니 ‘Get a free taste of Gold level’이라면서 무료 음료 쿠폰이 하나 왔다. 바리스타한테 메뉴 중에 제일 비싸 보이는 음료를 그란데 사이즈로 주문하면서 쿠폰을 쓰겠다고 했더니, 공짜인데 이왕이면 벤티 사이즈로 하란다. 뿌듯하게 마시면서 생각해봤다. 1달러 지출할 때마다 별 2개 적립이고 골드 레벨이 되면 별 125개를 모을 때마다 무료 음료 쿠폰이 나온다. 60달러 남짓 쓰면 6달러쯤 하는 음료를 공짜로 마실 수 있으니까 10% 가까이 적립되는구나 싶었다.
  3. 그래도 골드 레벨이 되려면 별 300개나 모아야 하는 데다가, 맥도날드나 학교에서 파는 커피가 더 싸니까 스타벅스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2주쯤 지나니 ‘Sprinting toward Stars’라면서 1주일 동안 2잔 마시면 별 25개, 3잔 마시면 별 100개를 보너스로 준단다. 그란데 라떼 세 잔 마시면 벤티 프라푸치노가 공짜네. 그 주에 세 번 갔다.
  4. 그다음에 날아온 프로모션은 ‘Menu Challenge’였다. 일주일 안에 라떼, 프라푸치노, Teavana Tea 세 가지를 다 마시면 별 125개를 준단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음료에다가 전혀 사본 적이 없는 한 가지를 섞어 놨다. 별에 눈이 멀어서 이제 Tea도 한 번 주문했다.

  1. 어느새 골드 레벨이 되었다. 다음에 날아온 프로모션은 일주일 동안 1잔 마시면 별 20개, 3잔 마시면 50개, 4잔 마시면 75개를 준단다.
  2. 이제 평일 출근하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랬더니 금토일에 3잔 마시면 별 75개를 준다는 프로모션이 날아왔다. 출근 안 하는 날 일부러 차로 5분쯤 걸리는 스타벅스까지 나가기는 귀찮은데, 3일 내내 갈 수 있을까 회의가 들어 무시했다.
  3. 그랬더니 다음 주말, 그다음 주말, 또 그다음 주말에도 같은 프로모션이 날아왔다. 별도 75개가 아니라 100개를 준단다. 마침내 주말에도 스타벅스에 나가게 됐다.

  1. 이제 음료만이 아니라 아침, 점심 도시락을 시도해보라는 프로모션이 왔다.
  2. 음료에 대한 프로모션은 일주일에 3잔 마시면 별 150개를 주는데, 단 구매 시각이 오후 2시 이후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나른한 오후에도 한 잔씩 마시게 하려는 것이다.

  1. 가끔 퇴근길에도 스타벅스를 들르게 되자, 최근에 날아오는 프로모션은 1주일에 7잔 마시면 75개, 10잔 마시면 175개 준다는 것이다. 7잔하고 10잔하고 차이가 상당하다. 주말에 가고, 주중에도 3일은 출근, 퇴근길에 다 들러야 한다.

원문: 감동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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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 성적 정정 메일을 받는 어느 교수의 소회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22367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22367#respond Mon, 17 Jul 2017 07:30:48 +0000 http://3.36.87.144/?p=122367 6월 말은 일 년 중 가장 괴로운 시기다. “인맥을 통해 기출문제를 구해다가 달달 외운 학생들 때문에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는 불만들이 있어서, 지난 네 학기의 시험 문제와 풀이를 수업 자료실에 모두 올려준다. 기출문제라 해봐야 어차피 교과서 예제 수준의 문제들이지만. 그리고 이번 전자기학 중간고사는 총 50점 중에 44점 어치를 기출 문제에서 그대로 냈고, 기말고사도 총 50점 중에 40점 어치를 그대로 냈다.

이런 시험의 평균이 총 100점 만점에 41.4점이다. 학점 퍼주기를 막기 위해서 A는 상위 30%까지만 줄 수 있고, B는 상위 70%까지만 줄 수 있다. 이것을 학생들은 30% 이내면 A를, 70% 이내면 B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학교는 퍼주는데 우리 학교만 너무 짜다”니까 위의 비율을 최대한 채워준다.

A+와 A0는 점수 차이가 유독 크게 나는 구간이 없다면 대개 15% 선에서 자른다. B+와 B0는 대개 50% 선이 되겠다. 그랬더니 73점 이상 A+, 59점 이상 A0, 40점 이상 B+, 22점 이상 B0, 12점 이상 C+, 1점 이상 C0를 주게 됐다.

이 필자분도 D+를 주는 심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지난 네 학기 기출문제 해봐야 겹치는 것들도 많아서 15개도 안 되고, 이것만 정말 달달 외워와도 163명 중 8등을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전자기학을 공부했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된다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고, 최소한의 성의 차원에서 봐도 C+를 받은 학생들은 사실 F가 마땅하다. F를 안 주는 유일한 이유는 저 학생들을 또 만나기 싫어서이다. 재수강하겠다고 들어와서 수업 분위기만 망치고 또 F 받아 마땅한 점수를 받아간다.

학기 수업 내내 받은 질문보다 더 많은 성적 청탁 메일을 받고 있다. 시험지 채점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은 학생의 당연한 권리다. 방학 중에 시험지 확인하러 학교에 나오면 번거로울까 봐 채점된 시험지를 스캔해서 이메일로 보내준다.

그것 말고 grade를 올려달라는 청탁 말이다. 이미 두 번 학사경고를 받아서 F를 받으면 제적당한다, 성적이 얼마 이하면 국가장학금을 못 받을 텐데 그러면 가정 형편상 학교를 계속 다니기 힘들다, 조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등 6년째 반복되는 얘기들이다. 한결같이 “이런 부탁드리기 무척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죄송한 줄 알면 하질 말아야지.

그래도 ‘죄송합니다만’ 쓰는 게 어딘가 싶다.jpg

예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재수강이 난무하는 문제 때문에 올해부터 B0 이상은 재수강을 막고 있다. 그러다 보니 B0를 줄 바에는 차라리 C+로 내려달라는 얘기다. 이건 합리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이런 청탁 메일들은 읽고 씹는다. 연구실 문 앞에 뻗치고 있는 학생들도 간혹 있어서 일부러 출근하지 않을 때도 있다. ‘텀블러 폭탄’도 좀 신경 쓰인다.

농부가 밭을 탓하면 안 되겠지만, 또 털고 일어나기 위해서 한 번만 구시렁거렸다.

우리 모두 힘내요… 2학기도 망하면 안되니까

원문: 감동근의 페이스북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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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학벌에 대해서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22369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22369#respond Thu, 13 Jul 2017 00:38:10 +0000 http://3.36.87.144/?p=122369 1.

나는 경남과학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서울과학고 수석에 간발의 차이로 뒤져서 전국에서는 2등이었다고 한다. 과학고에서는 매달 KAIST 입시 본고사와 같은 포맷으로 월례 고사를 봤는데 졸업할 때까지 1등만 했다. 2학년 마치면 내신 성적순으로 60명 중 20명 정도는 KAIST에 무시험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원서를 쓸 때는 TO가 몇 장이 배정될지 모르기 때문에 커트라인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조마조마해 했다. 나는 담임 선생님께 무시험 전형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어려운 양보를 했다며 감탄하시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내가 별 희한한 잘난 척을 다 한다고 아니꼽게 보는 동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라는 비중이 있으니 대놓고 그런 얘기를 하진 못했다. 내가 친구를 끔찍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는 정도로 부담감이 없었다. 900점 만점에 평균이 500점쯤 나올 때 내 점수는 750점이 넘는 식이었기 때문에, 150점짜리 한 과목쯤 통째로 안 봐도 넉넉하게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입시 당일 아침에 동문 선배들이 출정식을 벌여주고, 고사장 직전까지 따라온 수많은 학부모가 일제히 기도하는 것을 보니 그제야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나니 절대 떨어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시험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깜빡 졸았다가 감독관이 깨워 주기도 했다. 그리고도 결국 20등 안에 들어 당시로써는 거금 100만 원을 장학금으로 받았는데, 나중에는 돈에 눈이 멀어서 무시험 원서를 안 썼다는 얘기도 돌았던 것 같다.

2.

입시에 있어서는 재수 없을 정도로 천재였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되기에는 결정적인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상상력, 창의력은 고사하고 호기심이 부족했다. 기계/전자 제품을 뜯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유행하던 과학상자, 만능키트 같은 것도 그저 매뉴얼만 따라 했지 한 번도 책에 없는 것을 시도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입시 성적은 나보다 한참 떨어졌지만 이런 호기심이 있던 친구들이 더 뛰어난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획일화된 입시로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특히나 좋은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될 자질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3.

아주대에 부임해보니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바람에 더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주대에 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줬다. 네가 재수해서 서울대나 연/고대쯤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라. 그게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갖고 후회하지 말고 네 실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라이선스 하나로 먹고사는 분야에서나 평생 학교 간판 따지지, 엔지니어는 회사 들어가서 6개월만 지나면 어느 학교 출신인지 볼 필요가 없다. 그 정도 일 시켜보면 실력이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4.

너는 한국에서 나름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으니 그런 얘기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IBM 연구소에 막 취업했을 때 학벌 때문에 제법 주눅이 들어있었다. 매니저는 예일, 시니어 매니저는 하버드, 디렉터는 버클리를 나왔고, 팀 동료 네 명은 각각 스탠포드, ETH Zurich, 칼텍, MIT를 나왔는데, KAIST는 국내에서나 잘난 척하지 미국인들 중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5.

그런데 department 차원에서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되면 그 쟁쟁한 학교 출신들이 모두 옆 팀에 있던 Troy라는 친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반도체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려면 IC 회로, 패키징, 통신 아키텍쳐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데, Troy가 바로 이 세 분야를 통섭한 실력자였다.

대학원에서 회로설계를 공부한 다음에 모토로라에 들어가서 통신 시스템을 연구했고, IBM에 와서는 패키징까지 공부해서 전체 시스템 성능을 분석할 수 있는 in-house 툴을 혼자 만들었다. IBM으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인물이었으니 Troy의 연봉은 디렉터는 물론이고 VP보다 높았을 것이다. 내가 IBM을 퇴사할 때 제일 아쉬웠던 점도 바로 Troy한테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6.

언젠가 Troy와 공저한 논문이 출판 결정되어 biography를 요청했다. 사실 그 전까지 Troy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은연중에 탑 스쿨 출신이겠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Troy가 적어준 biography를 논문에 써 넣다가 깜짝 놀랬다. Michigan Technological University라는 생소한 학교였다.

7.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상담하러 오면 우선은 바로 취업하는 것을 추천한다. 공부를 꼭 대학원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회사에서 실제 문제와 부딪쳐보고 나서 어떤 공부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진학해도 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 시장이 해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8.

그래도 굳이 당장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면, 그다음으로는 그 점수로 어떤 학교들에 갈 수 있는지 옵션을 쭉 읊어준다. 연고대도 대학원은 미달이니까 어느 정도 성적 관리를 했으면 대개 서울 시내 아무 대학이나 골라갈 수 있다. 그러니 꼭 자대 진학만을 생각할 필요 없다고. 대신 타대에 진학하고 싶으면 정보가 부족하니 부지런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수업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는 이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지만 (물론 가끔 학부생한테는 천사였다가도 대학원생한테는 괴수로 돌변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타대에 진학할 때는 그런 피상적인 정보조차 없으므로 자대생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연구실로 배정될 위험 부담이 있다.

9.

잠재력이 보이는 학생은 내가 붙들어서 잘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열심히 가르치면 탑스쿨 대학원생 못지않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괜히 타대 진학했다가 괴수한테 걸리면 어쩌지…’ ‘내가 지금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나…’ 헷갈리기 시작하면 이 학생이 내 아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대개 더 좋은 연구 환경을 갖춘 학교에 있는, 열심히 연구하려는 교수를 소개해주는 것으로 결론 난다.

그 교수 밑에서 똑같이 노력해서 같은 성과를 내면 그편이 학생한테 조금이라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벌주의’에 반대하지만, 현실에서는 차별이 존재하며 그것이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또, ‘학벌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생한테 추가적인 노력을 요구할 생각도 없다.

10.

그런 다음에는 그 교수한테 잘 보일 방법을 코치해준다. 그 랩에서 최근 발표한 논문들을 공부한 다음에 그중에 흥미 있는 문제를 정해서, 학부생 수준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contact 한다면 십 중 팔구 호의적인 반응이 올 수밖에 없다.

11.

이렇게까지 해주겠다는데 굳이 내 연구실에 오겠다는 학생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받는다. 다른 데 갔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원문: 감동근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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