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interactive.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09 Dec 2021 07:16:2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interactive.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interactive.ppss.kr 32 32 무기력과 우울함에 빠진 당신,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242160 Wed, 02 Jun 2021 04:49:08 +0000 http://3.36.87.144/?p=242160 몇 년 전, 퇴사하고 시작한 사업이 오랫동안 지지부진하자 고통스런 우울증이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그땐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자책만 했죠. 자취방이 숨 막혀 새벽길을 어슬렁거리기도 했고, 까닭 없이 베갯잇을 적시곤 했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저는 일상을 회복했고, 자책만 하던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울증을 다방면으로 취재하여 『아임낫파인』이라는 영상 시리즈물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우울증을 다룬 영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I’m not fine’
제 이야기를 책으로 고백한 이후, 많은 사람이 우울의 길목에서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늘 건강하고 자신감 있어 보였던 지인이 저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어떤 얘기를 해주어야 할 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각기 다른 사연과 고통 앞에서 제 얄팍한 경험으로 위로한다는 것이 오만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럴 때 제가 건넸던 말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냥 조금 넘어져 있어도, 다시 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뜻이었죠.

교보문고 / YES24 / 알라딘 / 인터파크 / 네이버 책

그래서 책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를 만났을 때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나의 위로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여기에 우울증으로 부터 빠져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

 

우울증으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이 쓴 편지

엮은이 제임스 위디는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전, 자선단체에서 자살 예방 강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 정신병동에서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지 관찰당하는 입장이 되었죠. 전문가도 우울증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건데요. 단 한 사람만이 그에게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턴이었죠.

제임스, 우울증은 치유될 수 있어요.

제임스는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제임스는 자살시도를 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죠.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죽고 싶다는 얘기를 솔직하게 말하자, 희미하지만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치유의 편지’라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우울증에서 치유된 사람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2012년부터 시작한 ‘치유의 편지’ 웹사이트에서는 누구나 편지를 쓸 수 있고 또 읽을 수 있습니다. 책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에는 사이트에 올라온 편지 중 66편이 실렸습니다.

치유의 편지 웹사이트에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편지를 나눕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는 그 편지들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나약하기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 것은 아니에요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저는 가정의학과나 심리상담센터를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특히 남자들은 이를 더 어려워합니다. 실제로 상담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자라고 하는데요. 책 속의 ‘로나’의 편지처럼 우리가 우울이나 슬픈 감정을 갖는 건 나약하다고 배워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혹시 나약하다는 말을 들었나요? 나약하기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죠… 제가 나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한 줄기 빛이 보였어요. 저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또 한심하지도 않았죠.

  • p.24
다양한 사연을 책에 모아두었습니다

저는 슬프거나 힘들면 항상 이성으로 도망가곤 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상황이나 혹은 제 감정을 통제하려고 하고, 더욱 하던 일에 전념하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죠. 하지만 이 역시 방어기제의 일환이고, 나아지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상담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우울증의 범위를 정확히 알고 싶었고, 내가 그냥 우울한 건지 우울증인건지 구분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든다면 전문가를 만나야 할 때입니다. 우울증이 회복될 수 있다는 가장 긍정적인 신호는, 의사를 만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인지할 수 있다면, 인정할 수 있다면 이미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다 괜찮은 척하는 일을 그만 두세요

이 책은 실제로 우울증에 깊이 잠겼던 사람들이 쓴 편지인 만큼, 진실하고 사려 깊은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깊은 우울감과 무력감에 침잠해 있을 때는 활자조차 읽을 힘이 없겠지만, 내가 점점 우울의 늪으로 들어간다고 느껴질 때, 혹은 빠져나올 동아줄이 필요할 때를 위해 구비해둘 것을 추천합니다.

절망적인 때는 누군가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매달리고 싶고 부여잡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한번이라도 검색창에 ‘우울증의 증상, 죽고 싶을 때’ 등을 검색해본 사람이라면 그 절실함을 이해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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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관한 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전문가가 쓴 전문 도서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같은 수기인데요. 우울증을 겪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은 없었죠. 제가 만난 우울증을 겪은 사람들은 우울증이 덮칠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구체적인 지침이 실린 책이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도움이 될 만한 지점들이 많아 몇 문장을 공유합니다.

상담 치료를 꼭 받으시길 바랍니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세요. 약으로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혼자만의 비밀로 감추지 마세요. 우울증은 추잡한 비밀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일찍 말할수록,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 혹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을 더 빨리 만날 수 있습니다.

  • p. 70

기운 내세요, 씩씩하게 일어나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아껴주세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p. 71

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의 몸은 공격받았고 뇌는 타격을 입었을 거예요. 우울증의 여정에는 산봉우리도 있고 계곡도 있어요. 이를 지나고 나면 평탄한 도로를 마음껏 달릴 수 있어요.

  • p. 81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아요

모든 편지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지나간다는 것이죠. 우울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고통 너머에 다른 삶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죠. 하지만 분명히 끝이 있고,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괴로움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진다고 말합니다.

아마 당신은 오늘 치유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주 어쩌면 내년에도 치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하지만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해줄 수 있습니다.

  • p. 101

그리고 더 중요한 진실은 삶을 전부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보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숨쉬기도 버거운 날들이지만, 오늘 숨쉬기만 잘 해내면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이 편지를 보내는 이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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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할 때 살아있다고 느껴요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91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91#respond Wed, 12 Dec 2018 02:25:38 +0000 http://3.36.87.144/?p=179691 ※ 본 글은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해시온 영상 보러 가기

 

자해할 때 살아있다고 느껴요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은 특성상 익명성이 보장되는 트위터에서 활발하게 교류한다. ‘아임낫파인’도 초기부터 트위터에서 소통하며 도움을 받았는데, 우울증 친구를 찾는 아래와 같은 글을 쉽게 볼 수 있었다.

  • 우울계 자해O 사진 X

자해 사진을 올려서 공유하는 경우도 꽤 많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자해는 대개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깊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칫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일부 우울한 사람들이 동요되어 함께 하는 모습도 보여 걱정이 됐고, 한편으로는 그들끼리 위로가 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몇 명의 트위터 친구와 전화 및 DM(다이렉트 메시지)으로 인터뷰를 했다.

자해는 살고 싶어서 그은 상처예요

티티 님은 15살 때 자해를 시작해서 이제 4년째이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어느 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을 물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너무 힘들면 팔을 꽉 무는 습관이 생겼다. 스스로 자해를 시작한 건 열여덟살 부터였다. 커터칼로 ‘아프다’ 싶을 정도로만 긋고 있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폭력적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막다가 대신 맞았다. 그때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9살 때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 죄책감이 밀려올 때 자해를 한다. 자해가 발각되고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어 약을 먹고 있지만, 약을 먹는 것보다 자해할 때 빨리 감정이 진정된다. 후련해지고, ‘내가 사람이구나, 피를 흘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있다고 느낀다. 사실은 살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한다고, 그는 말했다. 모순적이라며.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몸이 이해를 못 한다고 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의무감이 들어요. 스스로 벌을 줘야 한다는 느낌이에요. 제 개인적인 과거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아프기 때문에 아무도 벌을 주지 않아요. 저는 벌을 받아 마땅한데 아무도 벌을 안주니까, 스스로에게 벌을 줘야 한다는 느낌으로 자해를 하고 있어요. 제가 미안함을 느끼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해봤는데, 친구의 결론은 ‘네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였어요. 그래서 저는 더 자해를 할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누나가 자해 상처를 발견하고 정신과에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정신과에 가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만류했지만 그의 팔을 보고는 결국 같이 병원에 가게 됐다. 엄마와 누나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어서 몰래몰래 했고, 이제는 다시 막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도 처음에는 ‘긁혔다, 다쳤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상처가 많아져 자해를 했다고 얘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많이 ‘많이 힘들겠다, 죽지 마라’ 하고 얘기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 콘셉트냐, 래퍼라도 할 거냐’하고 비아냥대는 친구도 있었다. 팔을 걷었다. 친구는 아무 말도 못했고 사이가 틀어졌다.

학교 가면 아이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손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때리려고 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공황장애가 오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고, 사람도 믿기 어렵기도 했다.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은 누나와, 키우는 강아지. 그리고 트위터 상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불행을 비교해요. 이러면 안 되긴 하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나는 덜 힘들고… ‘그래 아직 나는 행복한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 위안을 하게 돼요. 그럼 덜 힘들기도 하고. 오프라인에 진짜 친한 사람이 없다 보니 온라인에서 ‘살 수 있다, 괜찮을 거다’ 하는 게 고맙더라고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는 사람을 위로해주고 있는 느낌…

병원 선생님도 힘이 된다. 자해를 무작정 말리기보다는, “자살을 안 할 수 있으면 자해를 하는 게 낫고, 자해를 안 할 수 있다면 약을 먹는 게 낫다”라고 했다. 무조건적으로 자해를 말리지는 않았다. 친구나 부모님께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의사선생님께 말하는 것이 의지가 되었다. 약은 처음엔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 내가 괜찮아 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병원을 다니면서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해를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살고 싶어서 그은 상처예요.

 

비난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sue 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자해를 시작해서 4년째 자해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학으로 시작했다. 벽에 머리를 박거나 손톱에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었다. 초등학교 때 집단 따돌림을 당해서 전학을 갔는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싸움도 잦아 동생과 매일 방안에만 있었다. 자학을 하면, 마음이 힘든 게 잊혔다. 자학이 부족하자 손목을 긋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사건이 있을 때 자해를 했다. 부모님이 싸우시거나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그렇게 힘들 때 자해를 하고 피가 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 점차 사소한 일들에도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팔 뿐만 아니라 다리나 손, 발 여기저기를 그었다. 약하게 긋다 보니 흉터는 금방 사라졌다.

그러다 올해,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가 생겨서 wee 클래스 상담을 받게 되었다.(위클래스란 2008년부터 모든 학교 내에 설치된 상담 센터로, 다양한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상담한다.) 그때 상담 선생님이 손목에 있던 흉터를 발견하고 담임선생님께 알렸고,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께 알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에게 자해에 대해서 아무 말 하지 않으셨다. 다만 모든 커터 칼과 가위,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도구를 빼앗아 갔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모르는척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은 sue 님을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학교 상담을 계속 받고 있고 상담 선생님이 손목을 검사하는 바람에 자해는 비자발적으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은 다 뒤돌아서있고, 부모님은 바쁘시고, 선생님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 그녀는 곧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갈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그녀가 자해를 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그녀를 피하거나 자해하는 것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데 트위터에는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에서 자해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이상한 건가 했는데, 트위터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으니 안심이 되었다. 때로는 우울함으로 가득한 트위터를 보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는데 나는 약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해가 무조건 나쁜 것이다, 유행이라고 말하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

이해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보고도 모른척해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주변 사람이 자해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비난하지 말고, 상대방이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 사람도 분명 힘들어서 자해를 하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학생이라 혼자 병원에 가서 상담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금전적 여유가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개인 의사를 두고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고 말했다.

 

자해는 기분이 나아질 수 있지만 해결책은 아니에요

얼마 전 최의헌 원장님을 만났을 때 자해에 관해 물었다.

예전에는 자살과 자해를 비슷하게 취급했어요. 죽고 싶어서 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서 한다는 학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해요. 그런데 자살로 많이 연결되는 건, 목적 자체가 자살이거나 자칫해서 자살로 이어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요즘은 굉장히 세련된 자해를 하는 게 많아졌어요. 죽지 않을 수준으로 해요. 피를 보면 역설적으로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또, 이걸 SNS에 공유함으로써 사회적인 욕구가 충족되기도 하죠. 위로받고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울증은 자극으로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질 수는 있지만, 치료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자해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좋은 해결책이었다면 몇 번 하다 말겠죠. 그런데 자해는 계속 반복적으로 합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키우는 것이 될 수 있어요.

비슷한 게 술이에요. 잠깐 먹으면 좋아요. 어려움을 해소하죠. 하지만 반복적으로 자극을 추구하면 계속 쓰고, 자주 쓰고, 요령껏 쓰면서 병이 낫는 데는 결코 발전이 없어요. 우울증을 술로 해소하는 사람에게는 술 대신 약으로 바꾸자가 1차 목표예요. 마찬가지로 자해를 하는 분들에게는 자극 대신 다른 것으로 바꾸자가 1차 목표예요. 요즘은 고무줄도 쓰고 타투도 해요. 자극을 추구하는 다른 방법들을 찾는 것이죠. 하지만 자극이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에요. 결국은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받아야 해요.

어떤 선생님은 ‘자해는 너무 착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해를 입히지 못하고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도 그랬다. 트위터 타임라인에 내뱉는 살벌한 말들에 비해서 1:1로 대화했을 때에는 다들 한없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번 인터뷰는 트위터의 특성상 청소년이 많았다. (자해로 병원을 찾는 분들 중에는 성인도 많다) 청소년은 혼자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적기 때문에 우울증에 더 취약하고 괴로워 보였다. 왕따나 가족문제의 경우 어른보다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믿고 도움받을 수 있는 방안이 적어서 더 고립된 것 같다. 자해를 발견한 어른들은 놀란 마음에 청소년들을 쉽게 나무라고 비난한다. 청소년 심리문제에 관한 더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자해는 ‘자극’을 통해서 우울한 기분 상태를 해소한다는 점에서 술이나 담배와 같은 일시적 방편이다. 그러나 자해를 실패한 죽음이라고 생각하거나, 노래 가사나 트위터를 통해 유행처럼 번진다고 말하는 언론, 또 주변인의 영향으로 자해를 하는 사람은 두 번 상처를 받고 있다. 자해가 당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이해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찌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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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사람에게 없는 3가지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9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9#respond Tue, 04 Dec 2018 06:59:09 +0000 http://3.36.87.144/?p=179689 ※ 본 매거진은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에게 없는 3가지

우울증의 신체적 증상은 다양하다. 집중력,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체중의 변화가 생긴다. 또 만성피로감, 불면증, 과수면증, 두통, 소화불량, 목과 어깨결림, 가슴 답답함 등의 증세를 수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증의 양상은 다양하므로 반드시 신체 증상이 선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잠도 잘 자는데… 내가 우울증이 맞나? 이런 걸로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체적인 증상에 앞서 내가 어떤 생각을 자동적으로, 수시로 하고 있나를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스트레스, 연인과의 이별 등 다양한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자동적 사고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패턴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2주 이상 지속되면 어떤 좋은 일이나 좋은 신호가 생겨도 그 생각의 패턴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우울증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우울증에 빠지면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잃기 쉽다. 힘, 가치, 희망이 그것이다.

  •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무력감, Helplessness)
  •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 (무가치함, Worthlessness)
  •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무망감, Hopelessness) 생각한다.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한 인터뷰이와의 긴 대화를 통해 비슷한 패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도 잘 아는 분인데, 평소 업무적 능력과 성과가 모두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우울증 인터뷰이를 찾을 때 연락처를 남긴 것이 몹시 의아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런 인과관계를 떠나서 이따금 우울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울이란 객관적인 성과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무력감, Helplessness

무기력한 기분은 늘 들어요. 집에 가고 싶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잠적하고 싶다, 카톡을 보고 싶지 않다… 그냥 다 귀찮은 것 같아요. 다 귀찮고. 가장 무서운 건 모든 것에 자극도 못받고 가치도 못 느끼는 거예요. 뭘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도 없어지는 거죠. 보통은 무언가를 하는 동기를 외부에서 찾는다고 생각하는데, 외부에서 아무런 동력을 못 느끼고, 본능적인 욕구도 나한테 아무런 가치나 자극이 되지 않으니까… 나는 어디서부터 내 삶의 동력을 찾아갈 것인가…

무력한 기분은 신체적인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심한 경우 계단을 오르기도 벅차고,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겨우 샤워를 마쳐도 다시 자고 싶어 진다. 체력이 떨어진 것 같아 영양제를 챙겨먹었지만, 알고 보니 우울증이 원인이었다는 인터뷰이도 있었다.

무기력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실험으로 ‘학습된 무기력’ 이 있다. 첫 번째 실험에서 A그룹의 개들에게는 누르면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는 버튼을 주었고, B그룹의 개들에게는 피할 방법을 주지 않았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아주 낮은 울타리만 넘으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성했다.

A그룹의 개들은 모두 울타리를 넘어 피한 반면 B그룹의 개들은 울타리를 넘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쉽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무기력을 보인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혐오적 소음을 사용한 인간 실험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이는 오랜 시간 피할 수 없는 자극에 노출되는 경우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의욕도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힘이 생기지 않는 무력감은 매우 위험한 신호이다. 무력감이 2주 이상 지속되면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무가치함, Worthlessness

언젠가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사실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니까. 그런데 그 관계 안에서 내가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 아무리 해도 항상 더 잘하는 사람이 있고, 더 잘사는 사람이 있고. 세상은 날 때부터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기 싫죠. 대부분 그런 감정은 다른 타인에서부터 오는 거 같아요. 비교 대상으로부터.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박탈감이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끼게 해요. 내가 더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하는데, 나는 뭐 하고 있지…

내가 가치가 없다는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내가 할 줄 아는 건 뭔지, 쓸모가 없네. 난 쓰레기야.”라고 가혹하게 군다. 나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책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도 있다. ‘멍청이…’ 그럴 때마다 깜짝 놀란다. 왜 이거밖에 안 되지. 그때 왜 그렇게 말을 했지, 난 그거밖에 안 되나보다… 이런 생각 안에 갇히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 힘들다.

 

무망감, Hopelessness

절망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장 힘들어요. 내가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계속 이 정도 수준으로 있는 건 아닐까에 대한 불안감…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몰라 거기서부터 오는 부담감이 크고 무력함을 많이 느꼈죠. 발버둥 치면 삶이 나아질까 싶고. 0에서 조금씩 쌓아가는 것 보다, 마이너스를 0으로 만드는 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무망감이란 희망이 없는 감정, 즉 미래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다. 무망감의 척도를 살펴보는 ‘벡Beck 무망감 척도’는 미래에 대한 의욕이 있는가,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달성할 수 있는가를 측정한다. 심한 무망감은 자살위험으로 이어진다. 내일에 대한 희망, 나아짐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는 반드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위와 같은 감정을 조사하고, 우울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은 ‘참 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우울증의 원인과 발생하는 사건은 다양하다. 허나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너무 열심히 사는 혹은 살았던 사람이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가치 있는, 그럴만한 힘을 가진, 미래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충분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은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충만한 존재가 되고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감정이 계속된다면 우울증의 영향임을 깨닫고 꼭 전문가를 찾기를 바란다. 당신 의지의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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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매거진은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소개

해시온 팀 강령 님의 우울증 이야기

원문 : 찌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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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엄마가 우울증이었다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7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7#respond Thu, 29 Nov 2018 05:03:50 +0000 http://3.36.87.144/?p=179687 ※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가족 중에 우울증 환자가 있는 경우, 또 연인이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 무얼 해줘야 할지 몰라 너무 괴롭고, 또 우울한 감정은 쉽게 전이되기 때문에 함께 우울감에 빠지기도 쉽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동시에 끊임없이 관심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주제의 인터뷰이를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숱하게 거절을 당했다. 본인의 인터뷰는 허락했던 사람들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청에는 주저했다.

제가 우울증인 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요. 친척들도 모르고… 부모님 인터뷰가 나간다면 부모님께서 곤란해하실 거예요.

남자친구가 우울증이라 힘들긴 하지만… 저보다 본인이 더 힘들 거기 때문에 얘기할 수가 없어요.

〈아임 낫 파인〉은 사실 힘든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게 취지고 익명성을 보장한다. 그런데도 내가 아니라 행여 내 가족이 곤란해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이해 갔다. 그러니 이 가족들이야말로 어디 가서 쉽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우울증에 걸린 본인 만큼이나 힘들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마음이 아팠다.

수소문으로는 인터뷰이를 찾기가 어려워 SNS에 글을 올려 두 분을 만났다. 두 분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사연으로 연락을 주셨다. 엄마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A군의 이야기

엄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더라고요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다. 응급실에 모시고 가서야 엄마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워낙 밝은 분이고 항상 긍정적이며 아이들에게도 늘 이타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셨다.

게다가 병이 온 뒤에도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욕을 하고 비난하고,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십 가지 감정을 보이면서 웃다가 분노했다가 눈물을 쏟았다. 우울증 중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의 스트레스성 우울장애를 겪었다.

당시 집이 14층이었는데 화가 나면 계속해서 “너도 싫고 아빠도 싫고 다 싫다, 나는 이제 뛰어내려서 자살할 거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처음에는 A군도 같이 분노했다. 엄마가 불리할 때마다 무기 꺼내듯 아픈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공황장애와 관련된 책을 찾아봤다. 책에서 권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아픈 게 보이지 않아도 인정해야 그때부터 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했다. 엄마가 화를 내면 같이 내는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러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는 A군도 화가 나니까 잘 안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이고 엄마도 함께 어떻게 이겨나갈까 고민하게 되었다. 엄마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엄마가 오늘 몸이 안 좋구나, 감기 걸린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거구나’ 하면서 엄마의 감정의 집중해서 맞춰주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병원을 따라가서 의사 선생님을 보면서, 엄마한테 가장 필요한 건 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듣기 힘들다. 감정이 극에 달하니 나쁜 이야기만 하게 된다. 하지만 듣다 보니 엄마는 내 마음이 아프니까 내 얘기를 계속 들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가장 극단적으로 느낀 계기가 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보다 엄마의 화에 동조하여 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주로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랬어? 힘들었겠다’가 아니라 ‘나도 너무 힘들었다,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나도 너무 싫다’라고 함께 외치고 욕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엄마의 편이고, 엄마 옆에 있을 테니 같이 이겨나가자고 말했다. 엄마는 그제야 ‘그래, 아들은 내 편이지’라며 아들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게 엄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다 감정을 담는 항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울증을 가진 사람의 항아리는 그저 매우 작은 거예요. 그 사람들은 감정이나 분노를 조절하는 힘이 훨씬 약하고, 빨리 해소해주지 않으면 터져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거죠. 그 차오르는 감정을 함께 해소하려는 노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돼요.

발병 후 7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이제 많이 나아지셔서 일도 하시고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아들, 엄마 오늘 몸이 안 좋아”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제야 책에서 읽은 ‘병을 인정하는 것’이 무언지 온전히 알 것 같았다. 발병 초기에 엄마는 “인정하기 싫다, 내가 어떻게 이런 병에 걸릴 수 있냐.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줄곧 말씀하셨다. 본인과 가족들이 부정하기 시작하면 절대 고칠 수 없다.

본인도 가족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감정이 안 좋아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약도 먹고, 외출을 해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요즘은 ‘엄마 오늘 또 몸이 안 좋은갑네, 잠깐 요 앞에 몇 바퀴 돌고 오자, 아파트 몇 바퀴 놀자’하고 말하면, ‘그래, 엄마가 또 이겨내야겠제~’ 하면서 따라 가주세요. 처음에는 절대 안 움직였거든요. 이게 몸이 안 좋다는 걸 인정을 안 하면 절대 안 움직여요. 스스로 인정되면 어머니도 저도 할 수 있는 행동이 훨씬 많아지는 거예요.

완치는 없다. 하지만 항아리의 크기는 늘릴 수 있다. 감정의 항아리를 조금씩 키우고 넘치지 않게 스스로 조절하게 되는 것, 그게 엄마와 아들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고, 가족들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B양의 이야기

이제는 엄마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요

B양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과 3남매는 주말에는 같이 외식을 하거나 외식을 했다. 중학생 시절 갑자기 엄마가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든 게 아니라 갑자기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미성년자로서 허락이 필요하거나 의견을 묻는 모든 상황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은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늦은 시간에 편의점을 가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나가도 될지 몰라 혼자 방 안에 있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지금 과자 사러 잠깐 다녀와도 돼?

…….

엄마, 말하기 싫으면 고개라도 끄덕여.

여전히 아무 말과 표정이 없는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왔다. ‘이게 뭐라고 말을 안 해주지.’ 그 일은 B양에게 평생 깊은 상처로 남았다. 당시 주변에는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둘러댔다. 상황이 지속되니까 어른들끼리 상의를 해서 병원에 같이 갔고 1년 정도 입원도 하셨다.

꽤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엄마의 상태가 좋으셨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오늘날까지 말을 찾았다가, 다시 말이 없으셨다가 하는 시간이 반복됐고 가급적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어느덧 익숙하게 각자의 삶을 열심히 해나갔다.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더 자상하셨고, 남매들도 서로 의지하며 잘 성장했다. 다만 엄마와 함께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는 늘 걱정이 됐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엔 엄마가 못 오셨고, 커서는 결혼식에 엄마가 못 오시는 상황이 늘 걱정됐다(결국 엄마는 결혼식에 못 오셨다).

결혼 전에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가 반년 정도 집중적으로 노력해본 적이 있다. 10대 때는 외면을 많이 했고, 20대 때는 계속 떨어져 지냈으니 결혼을 하기 전에 엄마와 관계를 회복해보고 싶었다. 가장 답답했던 점은 엄마의 병명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께 물어봐도 ‘그 시절은 정신과 병명에 귀 기울이고 기억하던 시대가 아니었어’라고 할 뿐이었다.

정신건강에 대한 관념이 많이 다른 시대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이지만, 실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적도 없었다. 적어도 알면 어떤 조치라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병원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예전에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기억이 안 좋으셨는지 병원에 다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약으로 보이는 건 드시지도 않았다. 설득해보고, 졸라보고, 이판사판 울고불고 화도 냈지만 실패였다. B양은 엄마의 병명은 모르지만 그냥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B양은 어렸을 때부터 밝고 긍정적이었고, 또 엄마아빠와 함께한 유년 시절이 건강했기 때문에 다행히 사춘기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엄마가 아픈 건 속상했지만 탓해봐야 소용없고, 그녀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살았다. 커서는 그때 더 노력하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엄마는 이상한 게 아니고 마음이 좀 아픈 거잖아. 왜 이상하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나는 엄마를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리감을 뒀고, 고치려고 했구나. 엄마는 원래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고,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일 수 있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엄마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B양에 비해 동생들은 거의 처음부터 말수가 없었던 엄마의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그 모습을 엄마로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도 하나의 상태 값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랫동안 왜 우리 엄마는 남들과 다를까 생각하며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라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명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엄마와 엄마의 병,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루하루 더 행복하게 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우울증, 존재를 인정하기

우울증 초기에 있는 가족이나 연인을 만나면 갑작스런 부조화에 서로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입을 닫아버린 우울증 당사자와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가족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이겨내려고 혹은 가족의 우울증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온 A군과 B양을 보면 이미 우울증이 가족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은 편안해 보였을 뿐 아니라 사실 다른 가족들보다 더 농밀해 보였다.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고, 고맙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했다.

두 사람의 얘기 중에 공통적인 키워드는 인정이었다. 우리 가족 안에 우울증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이들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가족이 있다면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싸워나갈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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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찌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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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울증인 것 같아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3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3#respond Fri, 23 Nov 2018 03:09:44 +0000 http://3.36.87.144/?p=179683 외면하는 법밖에 몰랐던, 우울

사업이 망하면 빨간딱지가 붙는 줄 알았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회사를 뛰쳐나와 창업을 시작한 지 3~4년이 흘렀다. 매월 나가는 비용은 따박따박 똑같은데, 매출은 요원한 날들이 이어졌다. 모바일 앱을 개발하여 계속 기능을 업데이트하며 몇 년을 보냈지만,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거나 큰 투자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오랜 시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나는 지쳤다.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덮쳤다. 하루 4-5시간의 수면 시간 외엔 종일 일만 하던 나는 사무실 근처에 작은 원룸을 구했었는데, 침대를 벗어나 열 발자국도 갈 곳이 없었던 그 방이 블랙홀 같았다.

자정이 넘어 퇴근하고 겨우 몸을 누이면 끝없는 자책감과 무력함, 두려움이 나를 빨아들였다. 그 기분이 무서워 공원에서 서성이던 여러 밤. 차마 누르지 못한 친구의 전화번호. 맥락 없이 붉어지던 눈시울. 그런 날들이 길어져 갔다.

병원에 가볼까 생각해봤지만 ‘차마’ 검색마저 해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힘든 원인이 명확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성과가 없었던 거니, 성과를 통해서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기를 썼다. 게다가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출근해서 내가 책임져야 할 팀원들의 얼굴을 보면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 오늘 하루도 잘해보자.

 

해시온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때 밤마다, 침대에서 천장 벽지 무늬를 따라 그리며 수도 없이 했던 생각은 ‘내가 우울증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우울증이란 이런 걸까. 그냥 이 정도는 남들도 다 힘든 거 아닌가.

얼떨결에 시작한 책읽찌라는 뜻밖에 너무 잘됐다. 원래 운영하던 앱을 홍보하기 위해 매일 밤 페이스북 라이브로 책을 읽어주던 것이 시작이었다. 내 얼굴을 걸고 콘텐츠를 만드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떠밀려서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한 치 앞도 못 보는 날들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4년간 맛보지 못한 성취가 발생하자, 땅이 푹푹 꺼지는 것 같았던 우울감은 조용히 사라졌다. 하던 일의 결은 바뀌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2년 동안 꾸준하게 좋은 책을 소개하고 영상을 발행했다. 영상을 통해 구독자들과 소통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한 권의 책을 한 번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전달하는 지식의 범위에 한계가 있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하나의 주제를 다각도로 살펴보면서 접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시태그(#)의 해시(Hash)를 딴 ‘해시온’이라는 채널을 오픈했다. 책읽찌라가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발행하는 형태로 운영된다면, 해시온은 나영석 PD의 강식당, 알쓸신잡 등 시즌제 예능처럼 사전에 흐름이 기획된 프로젝트로 운영해보고 싶었다. 좀 더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 싶은 주제를 깊이 다뤄보고 싶었다.

둘째, 400편이 넘는 영상을 제작하고 올리면서 데이터로 읽을 수 있는 트렌드와 키워드가 있었다. 해시온은 이 키워드들을 주제로 다루기로 했다. 첫 번째 키워드를 꼽으라고 했을 때, 단연 #우울이었다. 그동안 우울, 불안, 인간관계, 심리에 대한 책을 소개하면 어김없이 사랑받았다. 그런 영상이 올라간 날은 댓글이나 메시지도 많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에 영상에서라도 답을 구해보려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우울을 찾아다닌 시간들

그래서 우울에 관한 20여 편의 영상을 기획했다. 주로 내가 우울증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과 궁금한 질문들로 출발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고치고 다듬어 나갔다. 놀라운 것은 내가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하나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병원을 다녔거나 치료로 나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한테 얘기를 듣다 보니 미안해지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나 이 친구에게 관심이 없었던가. 대개는 정말 마음에 그늘이 없을 것 같고, 에너지도 많고 열심히 사는 친구였는데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우울이라는 소재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고,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뎌야 했다고 담담하게 함께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커다란 위안을 받고 감사한 마음과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우울증과 관련된 전문가분들도 많이 찾아다녔다. 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선생님들이나 상담심리센터의 상담전문가 선생님들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우려를 들었다. 섣부른 지식을 전해서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이 자가진단을 하고 오판을 하면 어떡하냐고. 우울증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 달라서 일률적으로 진단하거나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들을 해주셨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답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아무 답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물음표만 가지고 힘들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문가의 의견과 검증을 토대로 우울증이 무엇인지 지식적으로 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병원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울증과 힘들게 사투하고 있는 분들이나 이겨낸 사람,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열린 눈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우울증을 보려 애썼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 마음을 읽는 시간』 저자이자, 심리상담전문가인 한 변지영 소장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소장님도 마찬가지 우려를 표하며 여쭤보셨다.

소장님: 우울증이 부각되는 사회적인 현상의 이면에는 다른 진실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제약회사들이 부추기는 측면이 크다고 봐요. 그 외에도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우울’을 소재로 소비를 부추기는 성향이 커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찌라: 소장님, 저는 방금 소장님의 목소리 그대로 담고 싶어요. 저한테는 지금 질문만 있어요. 취재하다가 병원에 좀 더 쉽게 가는 것이 옳다고 보이면 그렇게 담을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우울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힘듦도 같이 안고 가도 괜찮다고 보이면 그런 부분도 담고 싶어요. 우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열어놓고 최대한 많은 각도에서 담고 싶어요.

소장님은 쿨하게 “그렇다면 오케이”를 외쳐주셨고, 이 프로젝트 내내 큰 도움을 주시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고 계신다.

 

I’m not fine 나 안 괜찮아

책읽찌라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우울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때 내가 정말 아팠던 거구나, 나에게 야박하게 굴었던 점이 미안했다. 훗날 이 부분에 대해서도 프로젝트 초기에 만난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찌라: 선생님, 제가 그때 그렇게 힘들었지만 병원에 못 갔어요. 그게 진짜 우울증인지 모르겠어서요. 도대체 우울감과 우울증은 어떻게 달라요?

선생님: 그때 병원에서, 가희 씨 우울증 아니라고 했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찌라: 다행이었겠죠. 아 내가 일이 힘들어서 그렇구나, 일이 잘되면 괜찮은 거구나 하면서 집에 왔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러면 우울증이라고 했으면 어떨 거 같아요?

찌라: … 다행이었을 것 같아요. 그럼 내가 그냥 아픈 거구나 약 먹고 나으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을 것 같네요…

나는 이제 다시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 주저 없이 병원에 가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기까지는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가 필요할 뿐이었다. 내가 잘못하고, 부족하고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이 아플 뿐이라는. 그리고 이를 위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주고 괜찮지 않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I’m not fine’을 시작했다.

원문: 찌라의 브런치


키워드 큐레이션 콘텐츠, 해시온

우리의 삶에서 꼭 다뤄져야 할 질문들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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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 다녀온 후기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5 https://interactive.ppss.kr/archives/179685#respond Wed, 14 Nov 2018 05:13:39 +0000 http://3.36.87.144/?p=179685 ※ 본문은 책 『아임 낫 파인』의 일부입니다. 전문이 담긴 책은 스토리 펀딩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실은 책 『아임 낫 파인』의 작가는 따로 있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책을 집필해 줄 저자를 찾으면서 작년 독립출판물 중에서도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의 저자 김현경 님을 만났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쓴 르포집이다.

사실 『아임 낫 파인』도 유사한 기획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이 책이야!’ 하는 마음으로 현경 님을 찾아갔다. 현경 님 또한  흔쾌히 함께 해주시기로 했다. 그렇게 함께 프로젝트를 기획, 구상했다. 우울증은 두려운 질병이 아니고, 충분히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라는 그녀의 시선이 좋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프로젝트 중 현경 님의 우울증 상태가 현격하게 안 좋아졌다. 그러다 별안간 현경 님이 말했다.

저, 폐쇄 병동에 가요.

티는 내지 못했지만, 나는 너무 놀랐다. 대체 얼마나 안 좋은 걸까? 이제 앞으로 현경 님을 못 보는 걸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현경 님은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어찌어찌 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2주 정도 지나자 현경 님이 돌아왔다. 다시 힘차게 일을 하면서. 게다가 병동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한 권 뚝딱 완성해 오셨다. 그래서 현경 님과 폐쇄 병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또한 입원 경험이 있는 현경 님의 지인 민지 님도 함께했다.

 

폐쇄 병동에 가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자살 충동이 든다는 현경(우) 님

현경 님은 양극성장애, 즉 조울증이다. 조울증은 기분이 올라갔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잠도 오지 않고, 일의 효율도 좋다. 하지만 우울이 찾아오면 무기력함이 심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현경 님은 이 우울의 상태가 싫어서 술에 의존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니 자꾸 자살 충동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술이 깼을 때 동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성인 내담자에게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경우는 잘 없어서 좀 이상하다 싶었다.

병원에서는 자살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가거나 폐쇄 병동에 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현경 님은 폐쇄 병동을 택했다. 하지만 서울의 웬만한 대학병원에 다 전화를 돌려도 자리가 없다고 했다. 겨우 구해진 병원에 다음 날 입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큰 종합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이었다.

민지 님은 몇 년 전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 그녀의 자살은 오랜 계획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살을 주체적인 죽음이라 정의했고, 꼭 스물다섯 살 전에 죽겠다는 오랜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스물세 살에 첫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살은 실패했고, 그녀는 응급실에서 위세척 후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의사 선생님은 그녀가 돌아가면 또다시 자살 시도를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가족들에게 입원을 권유했다. 그래서 그 날 바로 폐쇄 병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좌)민지, (우)현경

폐쇄 병동이라고 하면 환자들이 위험해서 가둬놓는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위험해서’ 사회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폐쇄 병동’이라는 말이 공식 명칭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떠올리는 열악한 병동 같은 것은 아니라고 그녀들은 말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묘사했다.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의 다른 병동처럼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일 뿐인데, 다만 출입이 좀 더 제한적이며 대부분의 외부 자극이 차단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보호병동’으로 부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데 동의했다.

가장 큰 특징은 자살의 모든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샤워기도 흔히 보는 호스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천정에서 물이 떨어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은 창살 처리가 되어있다.

반입 물품도 제한된다. 수면용 안대도 끈을 이용해 목을 맬 수 있기 때문에 반입이 불가하고, 유리로 된 화장품 병도 자해를 할 수 있으니 불가하다. 색조 화장도 할 수 없다. 스마트폰도 외부자극이 크기 때문에 안 된다. 전화는 간호사들이 업무를 보는 스테이션 앞의 공중전화를 이용하는데, 전화 카드로도 자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시선이 닿는 곳에서 전화만 하고 돌려줘야 한다. 연락을 취하는 것이나 면회도 가족들에게만 제한된다. 거실에 유일하게 자리한 TV에서는 계속 뉴스가 흘러나왔다. 일상은 규칙적으로 흘러갔고, 그만큼 무료했다.

매끼 정시에 밥이 나와요. 밥 먹고 약 먹죠. 준비된 활동은 흥미가 없고 너무 심심해서 병동 내를 계속 걸어다녀요. 책은 책장에 많이 꽂혀있기 때문에 책을 보거나 TV를 봐요. 그러다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고, 하루 한 번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 선생님이랑 상담도 하고, 검사도 해요. 저녁을 먹으면 저녁 약을 먹는데, 약을 먹을 때에도 생년월일 말하고 이름 말하고 입을 벌려서 삼킨 것까지 확인해야 잠을 자러 갈 수 있어요.

제 약에는 진정제가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진짜 잠이 안 올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날에도 금방 잠이 오더라고요. 잘 자고 일어나는 게 정신건강에 좋대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수면을 잘 이룰 수 있게끔 도와주는 약을 주는 것 같더라고요.

담배 대신 정원에 있는 민트의 냄새를 맡았다는 현경 님

강제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술·담배야 당연히 못 한다. 담배를 못 피우니 정원에 나가 민트 냄새를 맡으며 참았다. 햄버거를 먹고 싶은데 못 먹으니 힘들었다. 대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꾸준히 약을 먹으니 건강이 좋아지고 우울증도 호전되었다.

좋았던 점으로는 현경 님과 민지 님 모두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어르신들이 많기는 하지만 누워서 휴식을 취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려도 “쟤 이상한 애다”라고 손가락질하는 일이 없었다. 예쁘게 꾸밀 필요도,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시간이 좋았다.

 

폐쇄 병동에서 만난 사람들

커피는 잠을 방해하기 때문에 하루 한 번, 오전 10시 반에만 마실 수 있다. 현경 님이 있던 병동에서는 그 커피타임에 함께 모여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는 자살 시도로, 누구는 우울증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가 심해서 들어왔다고도 했다. 어떻게 자살을 시도했는가, 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화제가 되었다.

다들 ‘이 사람은 왜 여기 들어왔지?’ 싶은 사람들뿐이었다. 밝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현경 님이나 민지 님 같은. 혹시 다른 사람을 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사람은 없었냐고 물어보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상태 안 좋은 사람들도 보였어요. 하루종일 창 밖으로 보면서 영어로 소리치는 아주머니도 있었어요. “New York! Paris! Tokyo! Anywhere! Everywhere! GO AWAY!” 막 이렇게 손가락질하면서 계속 외치니까 너무 무섭잖아요. 나를 해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제가 음악치료를 받으러 피아노가 설치된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먼저 와서 피아노를 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절 보더니 무서워하면서 슬금슬금 피하는 거예요.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나는 저 사람을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날 무섭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병동을 통틀어 나만큼 제정신이고 이성적인 사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속된 말로 ‘단단히 미친’ 것 같은 아주머니가 저를 피하니까 모든 편견이 싹 깨지는 느낌이었어요. (민지)

정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사람은 1인실에 격리되어 있거나, 경호원 혹은 간호사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현경 님도 비슷한 경험담을 얘기했다.

덩치가 큰 남자분이 들어오셨는데, 전 그분이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피해 다녔어요. 그런데 하루는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스테이션에 갔어요. 그런데 그 남자분이 마침 거기 서서 보호사에게 말을 걸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보호사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았어요. 덩치 큰 남자분이 다가오니까.

그런데 그 분이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시더니, 보호사님 손에 사탕을 이렇게 주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착하구나. 나만 화를 죽이고 잘 지내면 되겠구나, 라고. (현경)

아저씨들과는 배드민턴을 쳤고, 아주머니들과는 간식을 나누어 먹었고, 치매 할머니는 잘 챙겨드렸다. 또래와는 더 반갑게 붙어 버렸다. 하지만 환자들끼리는 나가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현경 님은 거기서 사귄 언니의 연락처를 몰래 속옷에 넣어 오기도 했다.

아,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당연하고도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엊그제만 해도 죽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살갑게 챙겨주고 아껴줬다. 한편 민지 님은 병동에서 가장 어렸던 만큼 많은 분들이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계속 자기가 임신했다고 말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그분이 계속 ‘호희’라는 여자아이를 찾았어요. ‘호희야, 호희야’ 하시며 저에게 다가오시더라고요. 제가 병동에서 가장 어린 여자였기 때문에 그분에게 호희로 보였나 봐요.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분의 호희가 되어 드리기로 했죠. “호희야” 하면 “네”하고 대답해 드렸어요.

그런데 하루는 밤에 자기 전에 와서 “호희야, 창밖을 봐. 너무 예쁘지? 여기서 사는 게 너무 힘들지? 너 이제 간다고 말해, 가도 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드라마에서 볼 법한 그런 문장들을 말해 주는데, 그분이 정말 저한테 나가도 된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그분이 하는 문장들이 너무 예뻐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다신 들어오고 싶지 않아요

병동의 생활은 어떤 자극도 없어서 건강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이 무료했다. 현경 님은 술을 안 먹는 생활이 지속되자 상태가 좋아졌지만, 우울이 없이 조증만 계속되니 잠을 거의 못 잤다. 퇴원해서 해야 할 일들이 계속 생각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환자들 중에는 어둡다면서 불을 계속 켜거나 혼잣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없던 수면 장애가 생길 것 같다며 주치의를 졸랐다. 이제는 괜찮고, 술도 안 마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행동 패턴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2주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보통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한 달 정도 치료 과정을 온전히 겪은 뒤, 2박 3일간의 외출을 통해 나가서 뭘 할지 계획하며 천천히 적응해 간다고 했다. 현경 님은 너무 답답한 나머지 열흘 정도 있다가 자발적으로 빠르게 나온 경우에 속했다. 다행히 현재는 술을 별로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민지 님은 상황이 좀 달랐다. 본인 의지로 들어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매일 아버지게 전화해서 꺼내 달라고 했다.

정말 자살 시도를 안 하겠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때는 정말 거짓말이었어요. 그래서 퇴원하게 됐죠.

앞서 말했듯이 민지 님은 스물다섯이 되는 2017년 12월 31일이 오기 전 자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그래서 다시 나가서 자살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병동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2018년이다. 민지 님이 말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민지 님은 우울증이 잘 치료됐다고 했다. 병동을 나오고도 크게 의지가 없어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다, 안 먹다 반복했다고 했다. 정신과 약은 안 먹으면 두통이 심해서 동네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고, 만 2년 6개월째 계속 약을 먹고 있다. 이제는 ‘이러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나중에 늙어서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가야 한다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민지 님은 정색을 했다.

아뇨, 절대 안 가요. 너무 답답해요. 너무 제약적이고요. 안전한데, 과하게 안전하거든요. 너무 심심하기도 하고, 제약적이기도 해요.

처음에 병원을 나설 땐 ‘또 자살에 실패하면 다시 와야 하니까, 실패 없이 죽어버려야겠다’라고 다짐할 정도였다고 했다. 현경 님도 절대 다시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만약 또 너무 죽고 싶어지거나 알콜 중독이 된다면 가야 하겠죠. 하지만 원해서 맨정신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폐쇄 병동에 가면 묶여 있는 것 아냐?”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편견이 컸음을 확인하게 됐다. 폐쇄 병동이라는 어감 때문일까, 가장 많은 오해와 왜곡 속에 있는 주제였다. 우울한 사람들이 격리되어 있다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꽁꽁 언 바다가 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퇴원 후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봤거든요. 남자 주인공이 실연당한 후 사랑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됐어요. 그다음 장면이 정신병원 침대 위에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인 거예요. 그걸 보면서 미디어에서 너무 잘못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경 님은 우울에 대해서 오래 말해왔기 때문에, 입원 후 SNS를 통해 알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히려 그렇게 밝힐 수 있어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정신과적으로 중환자실에 다녀온 정도로 비유했다. 다른 병에 비해서 더 심각하거나 감출 일도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랬다.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고, 다녀왔을 때도 수고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현경 님이 대기업에 다녔다면, 아니, 그냥 회사원이기만 했어도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는 말은 못 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가 입원할 당시에도 병원마다 환자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골라 간 게 아니고, 남는 곳으로 간 거였어요. 날씨가 좋아서 자살 시도가 늘어났고, 그렇게 들어온 분들이 많았어요. 정말로 환자들이 많은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왔다 갔다 했을 텐데…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에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옆에 있는) 이분 빼고. 그래서 정신질환이 얼마나 중요하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지 조금 더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울증, 이제는 이야기하자

사실 이렇게 기꺼이 나서주는 두 사람이 고마웠다. 영상으로 얼굴이 공개되면 혹여 안 좋은 평가가 뒤따르지 않을까, 나 혼자 괜한 노파심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만큼은 우울에 대해서 가장 공감 가는 언어로 건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민지 님은 17세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녔다고 했다. 약 10년째다. 약물치료 효과가 정말 좋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이 추천해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다양한 주제로 SNS에 글을 올리고 있다. 사실 민지 님과 현경 님은 인스타그램 친구였는데, 현경 님이 병원 추천을 부탁드렸을 때 민지 님이 DM으로 다니던 병원을 추천했다고 한다.

현경 님이 그 병원에 찾아갔는데, 옆에 앉은 할아버지와 밝게 말을 섞고 있던 아가씨가 갑자기 다가와 “옆에 앉아도 돼요?”라고 발랄하게 물어봤다. ‘아, 여기가 정신과라 미친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현경 님이시죠?”라고 민지 님이 말을 걸었다고 했다.

제 남친이 있는 그대로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거든요. 나 뚱뚱해지지 않았어요? 라고 말을 하면 안 쪘다는 말 대신 ‘예뻐요’라고 대답해줘요. 찌든 안 찌든 예쁘다는 의미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분은 어떤 조건이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있더라고요.

스스로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가 정신과적 질환이 있든 없든 나는 그냥 나야, 라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너무 쉽더라고요. 정신병동도 그냥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현경 님도 우울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분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쉽게 만들기 위한 사회를 만드는 나름의 운동이라고 했다. 병동에서 있던 일을 엮은 것도 그런 취지였다. 우울을 당당하게 말하자면서, 정작 자신은 숨어서 얘기하면 신뢰성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이들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가 닿기를 바란다. 누군가 가지고 있던 정신과 병동에 대한 오해와 인식이 조금 더 변화한다면, 그게 현경 님, 민지 님과 우리가 바라던 바다.

※ 해당 대담은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종합병원의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시외에 있는 장기 요양병원의 경우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격리를 목적으로 장기입원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 챕터에서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다루고자 했습니다.

원문: 찌라의 브런치


※ 본문은 책 『아임 낫 파인』의 일부입니다. 전문이 담긴 책은 스토리 펀딩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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